Follow JookJun on Twitter
      만당 최신 글
      만당 최신 댓글
counter
오늘:
536
어제:
579
전체:
2,165,637

정민이 체면과 내 체면

조회 수 6581 추천 수 112 2007.11.19 13:50:59

장계 농산물 축제 '장계 가는 날'에 가서 종진(17·가명)이 민정(15·가명)이 그리고 어머님과 내가 같이 놀러갔다. 구경꾼 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배부터 채워야 하는 법. 임시로 설치된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두 아이는 우리집에서 하는 <스스로세상학교> 학생들이다.

 
  
▲ 장계가는날 무대 사진
장계

해물파전과 도토리묵을 먹는데 종진이가 며칠 굶은 사람처럼 먹기 시작했다. 여기 와서 '배 터지게 먹겠다'며 끝내 점심도 안 먹고 온 종진이는 양 손으로 수저를 들고 번갈아 입에 퍼 넣었다.

 

못 먹겠다고 버티던 민정이가 그 모양을 보고 겨우 먹기 시작했다. 근데 종진이가 문득 나를 쳐다보더니 꺾는 시늉을 했다. '씩' 쪼개며.

"엉? 한 잔?"
술 한 잔 하자는 거냐고 내가 눈짓으로 물으니 옆에 있던 민정이가 한 발 앞서 나간다.
"소주? 막걸리?"

 

종진이는 무슨 조폭처럼 말 한마디도 않고 계속 손짓으로 꺾는 시늉만 반복했다. 술을 먹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괜히 내 앞에서 으쓱이는 게 귀여웠다. 내가 5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막걸리 한 병을 사 오게 했다. 민정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금세 막걸리 병을 하나 휘두르며 돌아왔다. 그런데 잔돈이 2천원이었다. 막걸리 한 병에 3천원이란다.

 
  
▲ 장계가는날 공연을 지켜보는 사람들. 종진이와 민정이.
스스로세상학교

바로 코앞 농협매장에서는 840원 하는 걸 뻔히 아는 나는 외지에서 온 손님들 대상으로 하는 장사라 해도 너무 비싸다며 막걸리를 물리자고 했다.

 

민정이가 질겁을 했다. 자기는 미안해서 절대 못 간다고 했다.

"제 체면이 뭐가 돼요? 저도 체면이 있다구요. 방금 사 놓고 이유도 없이 어떻게 물려요."
"괜찮아. 아빠가 안 드시겠다고 한다고 둘러 대."
아무리 등을 떠밀어도 못 간단다.

종진이한테 가라고 했더니 이 녀석은 가위바위보 하잔다. 그럼 둘이서 가라고 했더니 셋이서 가잔다.

 

결국 내가 졌다. 셋이서 함께 갔다. 나는 당당히 물렸다. 운전해야 하기 때문에 술을 안 마시겠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장계면 부녀회에서 차린 점포 같았다. 그래서 차마 코앞 농협매장에 가서 막걸리를 사 올 수가 없었다. 부녀회 기금 마련하려고 애들 쓰는데 야박하게 굴기가 미안해서다.

 

어쨌든 우리 '스스로세상학교' 아이들의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는 성숙함, 상거래에서의 신의성실, 함부로 뜻을 바꾸지 않는 일관성이 대견스러웠다. 이들이 축제마당을 두루 살피러 가고 없을 때 나는 혼자 매대로 가서 5천원 짜리 한 장을 드리면서 '성금' 이라고 했다.

사실 우리 식탁에 놓였던 해물전, 도토리묵, 단술, 김치는 모두 돈 주고 산 것이 아니었다.
한 젓갈 쑤시다 그냥 두고 일어서는 손님들이 두고 간 음식을 거둬 모았던 것이다. 종진이와 민정이가 인상을 찌푸리건 말건 나는 단호했다.

 

파종과 재배, 그리고 운송. 더구나 요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산화탄소를 만들어 내고 화석연료를 태워가며 이 자리에 오른 이 음식들을 절대 사람의 몸을 거치게 하지 않고는 두 눈 멀쩡히 뜨고 그냥 쓰레기 통으로 보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남이 먹던 것은 안 먹는다는 것은 못된 미신이라고 강변도 했다.

 

나의 음식에 대한 태도에 제법 익숙한 종진이는 곧 수저를 들었으나 ‘스스로세상학교’에 갓 온 민정이는 한참만에야 젓가락을 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내가 먹은 음식값에 해당하는 돈을 성금으로 드린 것은 민정이의 '체면'에서 배운 바 크다. 내 배가 체통을 지켜야 내 머리도 체통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당연히 계산대의 아주머니는 눈을 황소눈깔 만큼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이럴수가, 이럴수가'라고 했다.

 

종진이와 민정이가 돌아왔을 때 내가 음식 먹은 감사함으로 성금 5천원을 냈다고 했다. 좀 감동을 하라고 한 말인데 이놈들은 맨송맨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남은 음식 거둬 먹일 때는 찡그리더니 금세 다 잊었나보다.

엮인글 :

신독

2007.11.19 20:07:24
*.168.1.254

ㅎㅎㅎ,
체면/체통도 배가 불러야 가능하더군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83 어머니의 입숟가락 농주 2011-09-19 40741
82 페트병에 오줌 싣고 전철을 타다 - 미래청년 심.원.보. [1] 농주 2008-12-12 36464
81 [re] 페트병에 오줌 싣고 전철을 타다 - 미래청년 심.원.보. 농주 2008-12-12 16362
80 김수현 작가는 왜 뿔이 났을까 [4] 采日/33 2010-02-06 13893
79 세간법으로 읽는 - 재앙과 파국의 대한민국 농주 2009-02-03 11200
78 행복한 가정 이끄는 아버지의 리더십(펌) 아짐 2006-10-20 11195
77 일흔 셋 시골노인의 네티즌 입성기 [2] 농주 2009-06-13 10501
76 하루에 커피 얼마나 드세요? - 커피와 건강 깜찍이 2005-08-22 9403
75 황야의 천연비누 file [5] 전상완 2006-04-02 9273
74 <100일학교> 아이들과 보낸 8박9일 [1] 농주 2008-10-24 8504
73 어머니가 만드는 '옛날 곶감' 농주 2009-11-29 8017
72 먼 기다림 - 보따리대장 나가신다 농주 2010-06-08 7299
71 야생사과/나희덕 [1] 심심이 2009-05-19 6820
70 금연당 가입 [1] 采日/33 2010-12-30 6676
» 정민이 체면과 내 체면 [1] 농주 2007-11-19 6581
68 밥 세 숟가락에 설탕 한 숟가락씩 먹는 셈이라니.. [1] 농주 2010-06-18 6562
67 무농약 감귤 드세요! [63] 주이경 2005-12-13 6055
66 TV를 없애고 [6] 아짐 2007-02-15 5982
65 해 저문 개울물에 괭이를 담그고 농주 2007-05-12 5867
64 영농후계자의 청빈생활 도움 2006-09-14 5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