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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지다

조회 수 5475 추천 수 0 2010.07.09 06:49:19

글과 그림의 출처: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해방

 

“해방이 되자 그 환희는 대단했어. 일제 앞장서던 사람들은 쏙 들어가고. 대신 청년들이 나섰지. 그땐 먹을 것 없어도 신났어. 어느 마을 청년들이 더 싱싱하냐를 놓고 경쟁도 심했지. 심지어 농악 놀이 하는 거 있잖아. 걸궁(건립)이라고. 그 걸궁을 어느 마을 청년들이 더 잘하느냐는 경쟁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그때 축구대회와 기마 경주가 크게 유행을 했어. 경주용 말은 작은 조랑말이 아니라 일본 순사들이 타던 큰 호마였어. 학교 운동장에서 기마 경주를 하던 모습은 정말 대단했지.

 

자기 마을 청년이 기마 경주에서 이기면 크게 기뻐했고 그게 마을의 자랑이었어. 그때 미군들도 와서 구경했는데, 뭔가를 계속 씹는 거야. 그래서 우리끼리 ‘저놈의 종내기들은 뭘 저리 씹는 거지?’라고 말했어. 그게 껌인 줄은 나중에 알았지. 아무튼 우리 마을 청년들은 싱싱했어. 그런데 싱싱하고 요망졌던 그 청년들은 4.3사건 때 거의 다 죽었어.” (강연화. 2007년 76세. 표선면 가시리)

 

인민위원회

 

"일제 때 면정이나 고등 경찰을 했던 친일파들은 해방이 되자 꼼짝 못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동아 전쟁 때 공출과 징용 등으로 크게 인심을 잃었지요. 대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가 생겨 김현국 씨가 한림면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건준이 '인민 위원회'로 바뀌자 연로한 김현국 씨는 뒤로 물러나고 고운선 씨가 인민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부위원장은 좌두형, 서기국장엔 김행돈, 산업부장엔 고종석 씨가 맡아지요. 모두 깨끗하고 양심적인 훌륭한 분들입니다. 나는 청년 동맹 위원장을 맡았지요.

 

당시 인민위원회는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초대 도지사가 박경훈인데, 도지사 명의로 치안 관련 공문이 올 때 한림면 청년 동맹 위원장 이름을 먼저 쓰고, 그 밑에 한림 지서 주임 이름을 썼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치안 확보에 주력했습니다. 해방된던 해 10월까지만 해도 일본군들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미 군정과도 큰 마찰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각 지역의 청년 동맹 위원장을 모이라 하기에 제주 북국민학교로 집결했는데, 그때 스타우트 소령은 '일본군 물자는 결국 당신내들 것이 될 테니까 일본군이 불지르지 못하게 해 달라. 그리고 치안과 질서가 유지되도록 앞장서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고경흡 (高景洽) 1999년 86세, 한림읍 한림리, 당시 청년 동맹 위원장

 

3.1 대시위

 

"우리 마을에서도 젊은 사람치고 그 날 행사에 안 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주로 국민학교 선생들이 앞장선 일이지만, 3·1절 기념 행사를 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북국민학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하는데 산짓물 부근인가, 아낙네들이 동이에 물을 떠다 놨다가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더군요. 요즘 같으면 요구르트 같은 거 주듯이……. 허허. 지금의 중앙로에 이르니 호마를 탄 미군이 나와서 '가, 가!'하면서 해산하라는 시늉을 하더군요."

김용호(金容瑚) 1994년 73세, 애월읍 하귀2리.

 

발포

 

"네가 서 있던 곳은 칠성통 입구 쪽이었습니다. 당시 시위 행렬은 빠져나간 상태였고 광장 주변에는 150명쯤 관람 군중이 있었습니다. 기마경찰대가 북국민학교와 교통대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때 대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가 칠성통에서 관덕정 쪽으로 달려 나가다 기마경찰의 말 아래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는 말에 차였는지 길옆 고랑창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런데도 기마경관은 그대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던 구경꾼들이 욕을 하며 쫓아갔습니다. 몇몇 사람은 돌멩이질을 했습니다. 그때는 길바닥에 돌멩이가 천지 시절이라 돌멩이를 던지는 일이 쉬웠습니다. 기마경찰이 급히 경찰서 쪽으로 달려간 다음에 총소리가 터졌습니다."

고효생(高孝生) 1994년 75세, 애월읍 하귀1리

 

"나는 그때 관덕정 북쪽 길 건너편인 경찰관사 앞길에 있었습니다. 시위대들이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였구요. 시위 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통과할 때 중간 대열에서 S자형으로 굽이치듯 위세를 부리니까 리더급의 사람이 소리치면서 그러지 말고 빨리 지나가라고 하더군요. 시위행렬이 지날 때에는 경찰측과 아무런 충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기마경관이 달여오고 총성이 났지요. 경찰서 관사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팍팍 쓰러졌습니다. 무의식중에 경찰서 쪽을 보니까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발포하고 있는 경찰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요. 와락 겁이 나서 서문통 쪽으로 피신했지요."

김기용(金容沂) 1994년 73세,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박재욱 여인은 젖먹이 아이를 안은 채  식산 은행 철문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병원에 옮겨 온 후에도 몇 시간 동안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만 끝내 운명하고 말았지요. 총알은 그 여인의 오른쪽 옆구리를 관통. 왼쪽 둔부 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망루처럼 높은 곳에서 쏜 총탄에 맞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젖먹이 어깨에도 총알이 스쳐 지나갔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두용 (河斗瑢) 1994년 67세, 제주시 삼도1동, 당시 도립 병원 경리 주임.

 

넘치는 유치장

 

"유치장은 네 평쯤 됐는데 거기에 약 삼사십 명을 담아 놨다. 그러니 굶어 죽고, 목말라 죽고, 심지어 질식해 죽었다. 물이 없어서 자기 오줌을 받아먹는 사람도 있었다. 난 도의상 그냥 둘수 없었다. 그래서 큰 대야에 물을 담아 줘서 마음껏 먹게 했다. 또 부채를 여러 개 방마다 놔 주었다. 그랬더니 특무대에선가 날 조사하러 왔었다. 그러나 나는 연대장과 가까웠기 때문에 날 어쩌진 못했다."

김호겸(金浩謙) 1997년 81세, 서울시 은평구 역촌 1동, 당시 제주 경찰서 총무 주임

 

제주유치장은 한국의 어떠한 형사 시설보다도 넘쳐 나는 죄수를 수용하는 것으로 최악의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10×12피트(약 3.3평)의 한 감방에 35명이 수감되어 있다.

The Cheju jail presents the worst case of crowding found in any penal institution in korea. Thirty-five prisoners in a cell, ten by twelve feet.

미 군정청 특별 감찰관 넬슨(Nelson) 중령, <특별 감찰 보고서>(1947년 11월 12일 ~ 1948 2월 28일).

 

총파업의 관덕정 광장

 

"일본놈한테 쫓겨다니다가 해방이 되었으니 이젠 잘 살아지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시국이 어수선해서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총을 쏘아 사람들을 죽여 놓았으니 제주도가 떠들썩하게 된 것이지요. 남로당이 선동했다고 하나, 너 나 할 것 없이 경찰의 발포에 공분을 느끼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고경흡(高景洽) 1994년 80세, 한림읍 한림리.

 

미군정 경찰

 

"일제 말기엔 징용이나 징병뿐만 아니라 보리 공출 등에 너무 시달렸어. 심지어 제사 지내는 놋그릇까지 빼앗아 버리는 세상이었어.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관존민비 사상이 남아 있어서 면서기들조차 그 횡포가 대단했지. 그러니 경찰의 위세야 말할 것도 없지. 그러다 해방이 됐다 하니 이젠 좋아지겠구나 했는데, 일제 때 경찰이 그대로 미 군정 경찰로 옷만 바꿔 입으니 반감이 커질 수 밖에 없었지."

강순현(姜淳現) 1997년 81세, 제주시 용담2동, 당시 오현 중학교 교사 , 미 군정 관재처 불하과장 역임.

 

서청입도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 청년단(서청)을 파견했어요.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라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지요.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어요? 그 한 예가 제주도인데, 조병옥 박사가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4.3 사건이 나자마자 저를 불러 제주도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경찰 전투대를 편성한다고 5백 명을 보내 달라기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문봉제(文鳳濟) 당시 서북 청년회 단장, 북한 연구소 발행 <北韓> 1989년 4월호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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