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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삶의 조건이 뭔지를 고심하면서 이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적은 수다. 편한 길 놔두고 좁고 힘든 길로 들어선다는 주변의 충고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들의 선택 중에는 귀농이 있다.

지난달 우리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생태농업학교에 갔다가 고작 열여덟 살짜리 수강생을 만났다. 도시에서 살만큼 살고 정년이 되어 이른바 '이모작 인생'을 위해 귀농학교를 찾은 사람들은 많이 봐 왔지만 고등학교를 1학년 중퇴하고 농사를 짓겠다고 귀농학교를 찾은 경우는 처음이라 몹시 반갑기도 하고 동기가 궁금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반생태적인지를 아는 전문 직종 사람들도 귀농학교에서 간간이 만나지만 이런 어린 소년은 처음이었다.

생기가 넘쳐흐르고 아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강사의 질문을 제일 먼저 받아내는 그 모습이 바라보는 주위사람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어른의 고정관념을 못 벗어난 나는 부모나 가정환경이 독특할 것 같아 부모 직업을 물어봤다. 어머니는 급식소에서 식당 일을 하고 아버지는 아파트 보일러공으로 일한다고 해서 내가 좀 머쓱해졌다.

며칠 후 우리 집에 농사체험을 하겠다고 이 소년이 찾아왔다.

귀농학교 수료 선물로 받은 새 호미 한 자루를 달랑 들고 희희낙락하는 꼴이 볼수록 예뻤다. 작업복과 장화를 내 줬더니 복장도 야물게 갖추고는 제법 그럴싸하게 일을 해 내는 것이었다. 들깨 옮겨심기를 했는데 키가 큰 들깨는 길게 눕히거나 돌돌 말아 묻어서 땅 위로 올라오는 게 짧아야 한다고 했더니 금세 그 이유를 알아냈다. 들깨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감자를 캐면서는 감자에 상처를 주지 않고 캐는 방법을 일러주었는데 역시 잘 했다. 감자가 들어있는 범위 언저리에 괭이를 대고 지그시 당기는 모습이 농사일 처음 하는 것 같지가 않다고 했더니 도시에 사는 부모 밑에서 자라서 단 한 번도 밭에 들어 가 본 적이 없다고 제발 믿어 달라는 것이었다. 믿어 달라고 떼 아닌 떼를 쓰는 말투도 일에 흥이 넘치는 모습이다. 마음을 내고 정성을 기울이면 처음 하는 일도 누구나 잘해 내는 법이라고 한마디 할 때는 내가 아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이 소년이 돌아갈 때 선물로 감자도 한 보따리 싸 주고 내가 만든 천연염색 티셔츠도 주었다. 내가 쓴 책도 사인을 해서 한 권 주었는데 황석영의 삼국지를 보더니 아버지가 삼국지를 너무 좋아하는데 황석영 번역본은 못 읽었을 거라면서 한질 달라고 하여 줬다.

이 녀석은 자기가 막 다 읽은 책이라면서 배낭 속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주는데 놀랍게도 <사랑을 잊은 지구형제들에게>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고귀하고 신령스런 '근원적 존재'에 대한 책이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열여덟 소년이 관심을 갖고 스스로 골라 읽기에는 쉽지 않은 책이다.

엊그제 이 녀석이 뭐 하고 있나 궁금하여 전화를 해 봤다.

"○○아. 어디냐? 뭐 하냐?"

"아 네. 선생님. 저 ○○예요. 여기 강원도요. 수해났잖아요. 봉사활동 왔어요"라는 것이었다. ○○은 정말 굉장하다고 했다. 뭐가 굉장하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절개지가 뭉텅 무너져 내려 마을을 덮친 모습들이 주는 메시지가 굉장하다는 것이었다. 이 소년이 수해지역에서 받았다는 '굉장한 메시지'에는 어떤 신성함이 묻어나서 나도 모르게 엄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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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전국농어민신문> 2006년 7월 첫주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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