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83
야생사과 / 나희덕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 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까만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지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누군가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 월간 『현대문학』 2008년 2월호
누군가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나는 갑자기 나를 벗어난 순간과 조우한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나는 여기 있다.
지평선을 향해 앉아 있지만,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등 뒤의 나를 본다.
노을이 스미는 야생사과는 쭈글쭈글했을 것이다.
볼이 바람에 패인 얼굴 같았을 것이다.
존재의 깨어남은 언제나 달고 시고 쓰디쓴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
박형준 시인